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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심리학

정남규 연쇄살인범 생애 범행 범행지 검거 사망

by 생활정보와 뮤지컬 2023.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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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부터 2006년까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남부 지역 일대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연쇄살인범이자 쾌락살인범, 가정파괴범이었습니다. 그러나 최종 확정판결에 따라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그 후 수감 중 자살했습니다.

 

정남규 연쇄살인범 생애 범행 범행지 검거 사망
정남규연쇄살인범

 

정남규 와 유영철 관계

정남규와 유영철은 2004년 1월 14일부터 2006년 4월 22일까지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서 벌어진 일련의 범죄 사건의 범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남규는 13명을 살해하고 20명을 중상을 입힌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서울 서남부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밝혀졌으며, 또한 유영철의 소행으로 알려진 서울 이문동 살인사건의 범인으로도 드러났습니다.

 

사건 조사 과정에서 정남규는 "피 냄새를 맡고 싶다. 피 냄새에서는 향기가 난다"라는 말과 "백 명을 죽여야 하는데 채우지 못하고 잡힌 게 억울하다"는 발언을 했으며, 살인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정남규는 법정에서 "더 이상 살인을 못 할까봐 조바심이 난다"고도 토로했습니다.

 

이 범죄는 그의 흉악성으로 인해 KCSI 요원들 사이에서 역대 최악으로 평가되었습니다. 프로파일러들조차도 그의 행동에 대해 매우 비난하며, 최악의 연쇄 쾌락살인범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는 중벌을 피하기 위해 동정론에 호소하고 사실을 숨기려 들기도 했으며, 증거를 부정하다가 자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백하지 않거나 자신의 범행을 잊기도 했습니다.

 

정남규 생애

정남규는 1969년 4월 17일 전라북도 장수군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5남 4녀 가운데 일곱째로 태어났으며, 중학교를 졸업한 후 홀로 남원에서 자취하며 상업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가족이 인천광역시로 이사하면서 영진상업고등학교로 전학하였습니다. 그의 학업 성적은 중하위권에 머물렀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음료 공장에서 4개월간 일하였으나 직장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그만두고 방앗간에서 배달 일이나 건축 공사 현장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군대에 입대하여 육군 하사로 복무하고 만기 제대를 하였습니다. 그 후에는 특별한 직업 없이 생활하며, 범죄 행위인 절도 등으로 생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정남규는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지속적인 폭행을 받았으며, 동네 아저씨로부터도 성추행과 성폭행, 성희롱을 당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으로 인해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으며, 고등학교에서는 동급생이나 선배들에게 집단 괴롭힘과 학교 폭력을 겪었고 후배들에게는 무시당하는 일도 빈번했습니다. 고등학교 재학 중에는 자취방 옆에 살던 아저씨에게 두 번이나 성폭행을 당했으며, 군대에서는 선임들로부터 가혹행위와 심한 구타를 당하였고, 한 선임에게는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군 전역 후에도 후임들로부터 기수열외를 당하는 등 사회 생활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범죄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정남규는 1989년에 특수강도죄로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4년, 1994년에 절도죄로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과 벌금 20만 원의 선고를 받았으며, 1996년에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죄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고, 1999년에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죄(절도, 강간 등)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습니다. 또한 2002년에는 절도죄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은 바 있습니다.

 

정남규는 검거 당시까지 어머니와 친누나와 함께 인천 부평구의 한 주택에서 살았으나 가족 중에서는 직장을 가진 사람이 없어 기초 생활 수급자로 생활하였습니다. 그는 가난과 아동 학대, 가정 폭력, 성폭력, 학교 폭력, 가혹행위, 집단따돌림 등 많은 폭력과 어려움을 겪은 암울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과거 경험은 그의 피해자로서의 고통과 상관없이 무고한 이들을 살해한 그의 범죄를 어떻게든 정당화할 수 없음을 강조해야 합니다. 쾌락살인은 그의 환경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정남규의 범행

2004년 1월부터 5월까지의 초창기에는 정남규는 흉기를 사용하여 골목길에서 혼자 있는 여성들을 습격하는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언론의 집중 보도로 인해 그의 범행이 알려지면서 범행 방식이 변경되었습니다. 이후에는 주로 서울 서남부 지역의 다세대 주택가나 저소득층이 많은 지역을 범행 장소로 선택하고, 새벽 시간대에 문을 열어놓은 상태로 침입하여 둔기를 사용하여 범행한 후 방화를 일으키는 방식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이러한 범행 방식은 예전에 흔히 '가정파괴범'이라 불리던 것과 유사하며, 정말로 그의 범행으로 인해 피해 가정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정남규 범행 일지

  • 2004년 1월 14일: 부천시 소사동에서 윤모 군과 임모 군을 근처 춘덕산으로 데려가 성추행 후 살해.
  • 2004년 1월 30일: 구로구 구로동에서 원모 씨를 찔러 중상을 입힘.
  • 2004년 2월 6일: 동대문구 이문동에서 전모 씨를 찔러 살해.
  • 2004년 2월 10일: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에서 손모 씨를 찔러 살해.
  • 2004년 2월 13일: 영등포구 신길5동에서 서모 씨를 찔러 중상을 입힘.
  • 2004년 2월 25일: 영등포구 신길2동에서 홍모 씨를 찔러 중상을 입힘.
  • 2004년 2월 26일: 신림4동(현 신사동)에서 박모 양을 찔러 중상을 입힘.
  • 2004년 4월 8일: 신길4동에서 정모 씨를 찔러 살인미수.
  • 2004년 4월 22일: 구로구 고척2동에서 김모 씨를 찔러 살해.
  • 2004년 5월 5일: 동대문구 휘경동에서 최모 씨를 찔러 살인미수.
  • 2004년 5월 9일: 동작구 보라매공원 남문에서 김모 씨를 찔러 살해.
  • 2004년 8월 4일: 안양시 만안구 안양6동 주택에 침입해 안모 씨를 공격.
  • 2005년 4월 6일: 안양시 만안구 안양5동 주택에 침입해 강모 씨와 한모 양을 공격하고 방화.
  • 2005년 4월 18일: 금천구 시흥3동에서 모자를 공격.
  • 2005년 5월 30일: 군포시 산본동에서 김모 씨를 찔러 살해.
  • 2005년 6월 4일: 광명시 철산동의 주택에서 김모 씨를 공격.
  • 2005년 10월 9일: 관악구 봉천11동 장애인 주거 시설에서 홍모 씨 등을 공격.
  • 2005년 10월 19일: 봉천10동 주택에서 변모 씨를 공격 후 화재 발생.
  • 2006년 1월 14일: 도봉구 창동 반지하 집에서 김모 양을 추행하고 구타 후 도주.
  • 2006년 1월 18일: 강북구 수유동 송모 씨의 집에서 살인 및 방화.
  • 2006년 3월 27일: 봉천8동 주택에서 세 자매를 살해하고 1명을 중상을 입힘.
  • 2006년 4월 22일: 영등포구 신길6동 반지하 집에서 김모 씨를 공격 후 붙잡힘.

 

이 범행 일지는 정남규의 연쇄 살인 사건들을 기술하고 있으며, 그의 잔인하고 폭력적인 범행으로 인해 수많은 피해자들이 목숨을 잃었거나 중상을 입었습니다.

 

위에서 제시한 범행 일지의 사건들은 정남규의 범죄 기간인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발생한 사건들입니다. 마지막 피해자가 유일한 성인 남성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판결문을 살펴보면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2명의 성인 남성 피해자가 또한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남규는 주택에 침입했을 때 성인 남성이 깨어나는 경우에는 도주를 시도했지만, 자고 있는 경우에는 통제 가능한 상태라고 생각하여 계획대로 범행을 진행했습니다.

 

서울 중심 보안 약한 지역 범행지로 선택

서울 서남부 지역(구로구, 금천구, 동작구, 관악구, 영등포구, 광명시)를 중심으로 사건이 발생했으며, 일부 사건을 제외하고는 CCTV가 부족하고 보안이 약한 지역을 주로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지역은 주로 사회적으로 약한 계층이 거주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잔인한 범행의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정남규 본인도 자신이 약자들만을 공격했다는 점을 인정하였습니다. 물론 부유층 등 사회적으로 강자로 분류되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범죄도 미화될 여지가 없으며 잔인하지만, 정남규의 피해자들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선량하게 살아가던 사회적인 약자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더욱 안타까움과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사실입니다. 홀로 어린 딸을 키우던 어머니(우유 배달부 여성) 등도 피해자로서 비극적인 사건의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정남규의 범행은 CCTV가 부족하고 보안이 취약한 지역을 선택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건이 서남부 지역에서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그 지역에서는 비 오는 목요일 밤의 괴담이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언론에서도 '서울 서남부 지역 연쇄살인 사건'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정남규는 범행을 계속할 때 거주지 주변의 지리적인 이점을 고려하고 범행하다가 범행 사실이 크게 알려지면 안양시와 군포시에서 범행을 한 것으로 진술했습니다.

 

정남규의 잔혹성

2005년 10월 19일에 발생한 사건에서 정남규는 반지하 주택에 침입하여 남매 중 누나를 목졸라 살해한 후 동생도 둔기로 공격하여 살해를 시도했습니다. 이후에는 방에 불을 지르고 남동생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젓가락을 손으로 구부려 문고리에 걸어 잠가버렸습니다. 그리고 1층에서 남동생이 불에 타면서 고통받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사이렌 소리가 들리자 도망쳤습니다.

 

이 사건은 정남규의 잔혹한 행동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입니다. 그의 범행은 매우 충격적이고 가해자의 잔인한 행동과 희생자들의 비참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정남규의 범죄가 얼마나 잔혹하고 인간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남규 검거

정남규의 검거 과정은 매우 극적이었습니다. 2006년 4월 22일 새벽, 신길동의 한 다세대 주택에 침입하여 방 안을 샅샅이 뒤지지만, 소중한 물건을 찾지 못한 정남규는 분노하여 방 안에 자고 있던 20대 청년을 둔기로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정남규의 공격은 빗맞았고, 기절하지 않은 피해자가 저항하여 격투가 벌어졌습니다.

 

이때 옆 방에서 자고 있던 청년의 아버지가 도움을 주어 협력하여 정남규를 제압했습니다. 청년의 아버지는 정남규의 공격에 대해 비명 소리가 아주 짧은 순간만 들렸지만, 일반적인 비명과는 달랐다고 증언했습니다. 이후 정남규는 경찰에게 인계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남규는 경찰서로 이송되기 직전에 수갑을 찬 채로 순찰차 뒷자리에서 도주하여 동네 주민의 신고를 받아 2시간 후에 옥상에서 다시 검거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프로파일링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례입니다. 처음에는 정남규가 단순한 강도상해범으로 추정되었으나, 프로파일러 권일용의 추궁 노력에 의해 정남규의 자백을 받아내어 끔찍한 연쇄살인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권일용은 부천 소년 살해 사건에서 운동화 끈에 손가락이 묶여 성추행을 당한 힌트를 얻어내어 이를 활용하여 정남규에 대한 자백을 이끌어냈습니다. 이렇게하여 프로파일링의 성공이 이루어졌습니다.

 

정남규 범행의 특징

정남규는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드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심문 과정에서 범행 후 피해자가 끔찍하게 살해되는 장면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끼고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고 발언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정남규를 경악하게 되었습니다. 유영철은 정남규보다 한 수 아래라고 말한 적도 있었습니다.

 

정남규는 체포 후에도 시민들에게 공포를 안겨주었습니다. 분노한 시민들이 돌을 던지고 달려들려고 할 때 다른 범죄자들은 피하거나 숨지만 정남규는 시민들을 노려보고 맞서 달려들려 했습니다. 또한 연행차량 안에서 카메라를 향해 씨익 웃으면서 지켜보던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습니다. 권일용 프로파일러는 정남규의 이 웃음이 "나같이 사는 사람을 왜 너희가 비난하느냐, 너희들은 과연 나보다 낫냐"는 의미였고 세간을 비난하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정남규는 날카로운 흉기를 사용하여 범행을 저질렀고 성폭력과 방화를 함께 저질렀습니다. 그의 행동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성적인 동기에서 유발되었습니다. 또한, 정남규는 강간과 성추행을 여러 차례 저질렀으며 살인과 성범죄를 함께 저지른 적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행동들은 자신의 쾌락을 위해 범행을 준비하고 장소를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범행을 위한 준비

정남규는 범행을 준비하기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노력을 했습니다. CCTV에 잡히지 않기 위해 장거리를 도보로 이동하고 범행 현장에서 쉽게 도주하기 위해 체력 단련을 했습니다. 범행을 위해 체력뿐만 아니라 학습도 열심히 하였고 과학수사 관련 잡지를 많이 읽었습니다. 그는 사형을 기다리며 혼자 공부하고 준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또한, 정남규는 자신의 범행을 전하는 기사를 스크랩하고 수사 현황을 학습하는 등의 행동을 했습니다. 이러한 행동들은 정남규가 자신의 범죄를 자랑스러워하고 자랑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사형 확정과 자살 시도

2007년 4월, 대법원에서의 재판을 거쳐 정남규의 사형이 최종 확정되었습니다. 이후 2009년 11월 21일, 서울구치소에서 목을 매고 자살을 시도하였으며 그 다음 날인 22일 새벽에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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