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먼드 켐퍼(Edmund Kemper)는 미국의 연쇄살인범으로, 1970년대 초에 캘리포니아 산타 크루즈 지역에서 활동하며 여섯 명의 젊은 여성들을 살해한 후 시체를 해체했습니다. 흔히 "여대생 도살자"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는 주로 근처 대학의 여학생들을 표적으로 삼았으며, 이로 인해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범행은 그의 가족들에게까지 확대되었으며,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그리고 친어머니까지 희생되었습니다.

에드먼드 켐퍼 높은 지능과 신체 사이즈
에드먼드 켐퍼는 높은 지능과 거대한 신체 사이즈로 인해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의 미친 행동과 살인에 대한 차가운 계획성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범행에 대해 상세하게 진술하며 심리적인 즐거움을 느끼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범죄심리학에 영향
그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포와 경악을 안겨주었으며, 그의 사건은 범죄 심리학과 범죄 조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켐퍼의 사건은 연쇄살인범들에 대한 연구와 프로파일링에 활용되어왔으며, 그의 사건은 형사들이 범죄자의 마음을 파헤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에드먼드 켐퍼의 이야기는 그의 잔인한 범행과 잘못된 사회적 영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사례는 범죄 예방 및 범죄자의 심리적 도움을 위해 연구되고 있으며, 사회적 문제에 대한 논의의 중심이 되기도 합니다.
에드먼드 켐퍼 생애
어린시절
에드먼드 켐퍼는 1948년 12월 18일에 캘리포니아 버뱅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본명은 에드먼드 에밀 켐퍼 3세입니다.
켐퍼의 가정 환경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의 부모는 항상 서로를 비난하고 다투며 불화한 관계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가 아홉 살 때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켐퍼는 아버지인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를 좋아했으며 아버지와 함께 살고 싶어했지만, 그는 어머니와 두 명의 여동생과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가정 환경이 이미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켐퍼는 어린 시절부터 폭력적이고 사회적으로 이상한 행동을 보였습니다. 그는 이웃집의 고양이를 학대하거나 동생의 인형을 칼로 난도질하는 등 폭력적인 행위를 반복적으로 저지르곤 했습니다. 9살 때는 고양이를 칼로 찔러 죽인 뒤 시체를 묻어두었다가 나중에 머리만을 잘라서 옷장 안에 숨겨두었다는 사실이 어머니에게 발각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동생과 함께 가스실에서 고통스럽게 죽는 척을 하거나 전기 의자에서 사형을 당하는 놀이를 즐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켐퍼와 어머니 사이는 평생 동안 좋지 않았습니다. 켐퍼는 부모의 큰 키를 물려받아 이미 16세 때에는 193cm에 이르는 키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폭력적이고 이상한 행동들 때문에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위협적인 느낌을 주었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남편과 이혼한 후 1년 후에 켐퍼의 침실을 지하로 내리고 문을 잠가서 가족들이 자는 동안 그가 나오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어머니는 켐퍼가 자신의 여동생들에게 위협을 가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켐퍼의 어머니인 클라넬 엘리자베스 캠퍼는 매우 문제가 있는 부모였습니다. 그녀는 알콜 중독자였고, 어릴 때부터 켐퍼와 딸들에게 술에 취하고 폭언을 일삼았으며, 아들을 지하실에 가두고 학대하는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또한 켐퍼와 그의 누나들과의 관계도 좋지 않았고, 누나들은 독립한 후에도 어머니와는 의절한 관계였으며, 그녀가 죽었을 때에도 딸들이 슬퍼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켐퍼에 따르면 그녀는 그의 모든 행동을 비난하고 조롱하며 비웃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매우 닮아있었기 때문에 그의 큰 키를 조롱하며 비하했습니다. 또한 그의 외모를 비하하며 어떤 여자도 그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켐퍼와 어머니는 항상 언쟁을 벌였고, 이런 말싸움은 결국 켐퍼가 어머니를 살해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프로파일러들은 켐퍼의 최종적인 목표가 항상 그의 어머니였을 것이라 추측했습니다.
어린 시절 켐퍼는 영리했지만 수업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존감이 낮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학교에서 이방인으로 여겨졌으며 정서적으로 불안정했습니다. 큰 키에도 불구하고 또래 아이들에게 조롱과 괴롭힘을 당하고, 가정에서는 어머니의 학대에 시달렸습니다. 이로 인해 켐퍼는 동물 학대 등 반사회적인 성향을 점점 강하게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일반적인 놀이 대신에 동생이 가진 인형들의 머리와 팔다리를 잘라내거나 이웃의 애완고양이를 칼로 찌르고 토막내는 등의 행동을 자주 보였습니다.
실제로 켐퍼는 자주 폭력적인 환상에 몰두했지만, 상담교사를 포함한 선생님들은 그가 조부모를 살해할 때까지도 그러한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이는 그의 어린 시절부터의 악화된 가정사와 어머니의 학대로 인해 그의 인격이 막장으로 변화하기 시작했으며 이성에 대해 비정상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조부모 살해
1962년, 켐퍼는 어머니와의 갈등이 심해져서 아버지와 함께 살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이미 재혼하고 아이까지 낳았기 때문에 켐퍼를 거절했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 집으로 돌아가도록 권유했지만 어머니가 거부하자 결국 켐퍼를 받아들여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지 않은 1963년, 그의 아버지는 켐퍼를 조부모의 집에 맡기고 사라져서 결국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켐퍼는 조부모의 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버림받은 켐퍼는 조부모의 집에서 자신을 버린 부모에 대한 분노를 품고 있었습니다. 또한 조부모와의 간섭과 잔소리로 인해 큰 갈등을 겪었으며, 할아버지를 매우 경멸하고 잔소리를 많이 하는 할머니를 증오했습니다. 이미 형성되어 있던 여성에 대한 비정상적인 인식과 어머니에 대한 증오로 인해 켐퍼는 할아버지보다 자신에게 잔소리를 하는 할머니에게 분노를 표출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분노로 인해 켐퍼는 조부모와의 갈등이 심해지고,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켐퍼의 행동에 대해 혼나면서도 켐퍼를 두려워하여 가방 속에 권총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켐퍼는 경찰에게 할머니가 은행을 털 거라는 농담을 하며 할머니가 자신을 믿지 않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64년 8월 27일, 켐퍼는 평소와 같이 사냥을 하려고 총을 챙겨 나가려고 했는데, 할머니와의 사이에서 말다툼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가벼운 말다툼이었지만, 할머니가 등을 돌리고 멀리 걸어가자 켐퍼는 갑자기 뒤에서 그녀를 총으로 쏘고, 그 후 부엌칼로 그녀를 찔러 살해했습니다. 잠시 후 외출 중이었던 할아버지가 돌아와서, 마찬가지로 할아버지를 총으로 살해했습니다. 범행 후, 켐퍼는 조부모의 시체를 차량에 숨겼습니다. 조부모를 살해한 직후, 켐퍼는 겁에 질려 어머니에게 전화하고 어머니가 자수를 권유함에 따라 켐퍼는 경찰에게 범행을 자백하고 자수했습니다.
아타스카데로 수용 생활
체포된 켐퍼는 캘리포니아 소년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재판 도중에 그의 IQ가 145라는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켐퍼는 할머니를 왜 죽였는지 묻는 질문에 단순히 그녀를 쏘면 어떤 느낌이였을지 궁금했다고 대답했습니다. 판사는 켐퍼가 조현병을 앓고 있다고 판단하여 아타스카데로 주립병원에 수용되기로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아타스카데로에서의 경험은 켐퍼의 반사회적인 성향과 폭력성을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수감된 다른 강간범들의 이야기를 듣고 가상적인 성적 환상을 키우며 그들의 범행 수법과 사후 대처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아타스카데로의 의사들은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켐퍼는 영리하게 행동하며 겉으로는 모범적으로 보였기 때문에 의사들과 병원 직원들은 그를 신뢰했고, 그에게 정신병 감별 진단 도구들을 볼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게다가 켐퍼는 다른 죄수들의 진단을 감별하고 관리하는 권한까지 부여받았습니다. 그는 뛰어난 두뇌를 지닌 켐퍼는 28개의 진단 도구를 모두 외워 의사들을 속여넘기며 정신병이 치료되었다는 소견을 받았고, 결과적으로 정신병원에서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켐퍼의 아타스카데로에서의 경험은 그의 반사회적 성향과 폭력성을 더욱 강화시키는데 이바지했으며, 켐퍼는 영리하게 행동하여 의사들의 신뢰를 얻고 정신병 감별 진단 도구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신상태를 속이고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켐퍼의 정신적인 변화와 병원의 실수로 인한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가석방 출소 이후
켐퍼는 1969년 12월 18일, 21번째 생일에 가석방되어 세상에 나왔습니다. 전과는 말소되었지만, 살 집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의사들은 켐퍼가 어머니와 함께 살 경우 양쪽에게 독이 될 것이라고 충고했지만, 선택지가 없었던 켐퍼는 어머니와 함께 살기로 결정했습니다.
출소 후, 켐퍼는 경찰 보조 일을 하고자 했지만 큰 키와 체중 때문에 거부당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찰관들과 친해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켐퍼의 어머니인 클라넬은 사무보조자로 일하는 일을 얻었고, 켐퍼도 해당 대학의 커뮤니티 칼리지에 잠시 다니게 되었습니다. 켐퍼는 교통 및 기타 일자리를 얻어 성실하게 일하며 조용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오토바이 사고로 왼팔을 다치게 되었습니다. 보험금으로 15,000달러의 보상금을 받았지만 일을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돌아온 집에서는 어머니의 알코올 중독과 폭언으로 인해 불화가 심해졌고, 어머니의 폭언을 듣고 분노가 폭발하여 상상했던 살인을 저지르기 위한 범행을 계획하고 실행하게 됩니다.
켐퍼 연쇄 살인의 시작
켐퍼가 살인을 결심하고 산타크루스의 산악지대로 이동한 후, 1972년 9월부터 그의 엽기적인 연쇄 살인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총과 칼을 이용하여 5명의 대학생과 1명의 중학생을 납치하고 살해했습니다. 희생자들을 살해한 후 시체를 토막내고 성적인 행위를 하며 머리를 절단했습니다. 그는 머리카락, 피부, 치아 등을 수집하기도 했습니다.
켐퍼의 자수와 판결 종신형
경찰은 켐퍼를 의심하지 못해 몇 달간 사건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켐퍼는 계획적으로 시체를 처리하고 단서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용의자로 의심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켐퍼는 직접 경찰에 전화를 걸어 자수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경찰은 처음에는 그를 장난치는 사람으로 생각해 전화를 끊어버렸지만, 켐퍼는 경찰서 경관의 개인번호로 전화를 걸어 자신이 연쇄살인범임을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경찰은 놀라워하며 켐퍼를 체포하고 수사를 진행했습니다. 켐퍼는 감옥에서 자살을 시도했지만 제지되었고, 법정에서 자신의 범행을 진술했습니다.
켐퍼는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현재는 캘리포니아 주립 의료 시설 교도소에서 복역 중입니다. 교도소에서는 정신과 의사와 다른 죄수들의 약속을 잡는 일을 담당했으며, 도자기 제작에 능한 장인이었습니다. 또한 블라인드 오디오북을 녹음하는 등 활동을 통해 도움을 주었으며, FBI와의 인터뷰 및 연쇄살인범에 대한 행동연구에도 협조했습니다. FBI 프로파일러인 존 더글라스는 켐퍼를 인터뷰한 재소자 중 가장 똑똑하고 폭력적인 범죄자에 대한 통찰력이 뛰어나다고 평가했습니다.
켐퍼는 1979년, 1991년, 2002년, 2007년, 2012년, 2017년에 가석방 기회를 얻었지만 모두 거절하고 교도소에서의 생활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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